Print Sermon

이 웹사이트의 목적은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과 목회자들, 특히 성경학교나 신학교가 많지 않은 개발도상국에 무료로 설교원고와 영상을 제공함에 있습니다.

이 설교 원고는www.sermonsfortheworld.com을 통해서 매년 221개 이상의 국가들과 약 1,500,000대의 컴퓨터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YouTube에서도 수백명의 사람들이 영상을 시청하고 있으나 그들은 곧 YouTube를 통해 우리 교회 웹사이트로 오고 있습니다. YouTube를 통해서 사람들이 우리 웹사이트로 오고 있습니다. 설교 원고는 46개의 언어로 매달 120,000대의 컴퓨터를 통해 번역되고 있습니다. 설교 원고는 저작권이 없으므로 별도의 허락없이 설교자들은 원고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무슬림과 힌두교 국가들을 포함한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매달 기부금을 통해 함께 동참하시길 원하시면 이 곳을 클릭하시길 바랍니다.

Dr. Hymers 에게 이메일을 쓰실 때에는 어느 나라에 사는지 반드시 알려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답장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Dr. Hymers의 이메일 주소는rlhymersjr@sbcglobal.net 입니다.




DR. ROBERT BOYD MUNGER의
“내 마음 – 그리스도의 집” 의 대한 비평

(A CRITIQUE OF DR. ROBERT BOYD MUNGER’S
“MY HEART – CHRIST’S HOME”)

by Dr. R. L. Hymers, Jr.

이 설교는 2010년 8월 15일 주일 저녁,
로스엔젤레스 테버네클 침례교회에서 선포되었습니다
A sermon preached at the Baptist Tabernacle of Los Angeles
Lord’s Day Evening, August 15, 2010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Franklin Graham은 보통 자신의 설교를 마칠때마다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마음안으로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시기를 부탁하세요.” 이러한 견해는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John Flavel (1628-1691)은 요한계시록 3:20 의 관한 씨리즈의 설교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 안으로” 한다는 “부탁” 이나 “허용”은 찬송 때문에 악명을 얻게된 것 같습니다, “Let Jesus Come Into Your Heart” by Lelia N. Morris (1862-1929). 그러나, Dr. Robert Boyd Munger의 소식지, “My Heart – Christ’s Home” [내 마음 – 그리스도의 집] (여기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을 통해 20세기 후반기 때 이 견해가 매우 유명해 졌습니다. 그 조금만 책 안에서는, Dr. Munger가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저는 어느 밤 예수 그리스도를 제 마음안으로 모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입장을 주님이 하셨는지요! 이 체험은 위대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이었습니다…주님은 어두운 나의 마음 안으로 들어 오셔서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Dr. Munger (1910-2001) 은 Fuller Theological Seminary [풀러신학대학원] 에서 복음을 수년동안 가르치셨습니다, 1960년부터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그리고 이분의 메시지,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은, 아주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견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안으로 초청하세요”는 구원을 얻게되는 공식의 한 부분이 되면서 현대-복음적주의자들 사이에서 너무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Dr. Munger의 설교의 본문말씀, 에베소서 3:17절은, 방황하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 안으로 초청”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내었던 서신은 방황하던 죄인들에게 보내 서신이 아니었습니다. 이 서신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 1:1). 그래서, 에베소서 3:17절은 , Dr. R. C. H. Lenski가 주목한 것처럼, “우리 마음 안으로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힘을 얻는 것으로 더 나아가는 내주함 입니다 [16절]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오십니다” (R. C. H. Lenski, D.D., The Interpretation of St. Paul’s Epistle to the Ephesian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61 edition, p. 494; comments on Ephesians 3:17).

Dr. Munger가 사용하신 다른 구절은 요한복음 14:23 절 입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하지만 이것 또한 성령님의 역사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17절를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14:16-20).

성령님의 역사의 문맥 안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들의]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3).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11절과 로마서 8:9절에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언급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Dr. Henry M. Morris가 언급했습니다,

주목하세요, 이 한 구절안에서는, 성령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이 용어들은 동의어 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성령님도 하나님 입니다 (Henry M. Morris, Ph.D., The Defender’s Study Bible, World Publishing, 1995 edition, p. 1239; note on Romans 8:9).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는 이가 (에베소서 3:17),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인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 과, “그리스도의 영”까지도 (로마서 8:9) “그에게 가서[한 사람에게] [그의]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디모데전서 2:5).

회심한 한 사람의 마음에는 삼위일체의 두 인격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도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세번째 인격, 성령님께서 회심할 때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럼, 요한계시록 3:20절은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이 말씀 구절에서 주목하실 것은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 단어에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가, 들어 오신다고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오시는 것입니다! 계다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방황하던 죄인은 의지의 행위로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께 열지 못합니다, 기도문을 읽어서는 더 확실히 열지 못합니다! Dr. Lenski가 언급했습니다,

죄인이 자신의 의지를 행함으로서,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이나 기도]로서,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은 협력설 주의자들로부터 잘못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볼수 없는 것은 의지가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묶여 있는 이유 때문에, 문을 열지 못하는 것입니다…진실은 [그리스도께서] 문 앞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거기 서서, 두드리면서 자신의 음성으로 부르십니다. 이 상황에서는 문을 열게 하는 움직임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주님의 능력인 사랑과 은혜와 주님의 말씀으로…마음 안으로 도달하여 열리게끔 움직이게 하고 영접하게 합니다. 바로 이 장면을 여기서 말하는 것입니다 (R. C. H. Lenski, D.D., The Interpretation of St. John’s Revelation, Augsburg Publishing House, 1963 edition, pp. 162-163; note on Revelation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들으시는 설교들을 통해 예수님은 여러분의 양심에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일은 일차적인 방법입니다, 율법과 복음을 전함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의 양심이 “찔림”을 받고, 외치게 되면, “우리가 어찌 할꼬” (사도행전 2:37) 그러면 여러분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고자 열려질 수 있습니다 – 천국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여러분을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15번식이나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 몇 참고할 구절들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브리서 10:12).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마가복음 16:19).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사도행전 2:32-35).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4).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에베소서 1:19-20).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로새서 3:1-2).

그리고 우리의 본문말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8 구절이 더 있습니다 – 승천하신 그리스도, 그분의 부활된 뼈와 살의 육체 – 는 천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부터 내려 오셔서 한 아이가 말하듯이 “여러분의 마음의 구멍 사이로 다니지” 않으십니다. 이 아이는 Dr. Munger의 책의 가르침으로 혼돈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 아버지의 보좌에 계시지만, 내려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의 구멍 사이로 다니지” 않으십니다! 말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과 삶의 죄로부터 확신을 얻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열려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이끌림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대속을 통하여 여러분의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보배로운 주님의 보혈로 씻으심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과 진정한 회심의 길 입니다!

Dr. Munger의 책의 있어서 제가 발견하는 다른 비평은 너무 복음이 없다는 견해 입니다. 복음의 관한 유일한 암시는 “The Hall Closet” 주제가 기록된 부분에서 마지막 문구입니다.

과거에 어떠한 죄나 아픔이 있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용서하십니다, 치유하셔서 온전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Dr. Munger은 무슨 죄인지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박사님은 인간의 타락의 대해서 언급한 말이 없습니다, 내적으로 하나님을 저항하는 부패. 또한 외적으로 지으는 죄의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박사님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셔서 온전하게” 하신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박사님은 죄인의 자리를 대시하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박사님은 그리스도의 끔직한 고난이 자신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죄인들을 대신하는 고통이란 것을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박사님은 그리스도의 대속사의 관한 말도 없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 셨도다”
       (이사야 53:5-6).

또한, Dr. Munger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관한 말도 없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19). 박사님은 이러한 말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22).

이것이 순전한 “결정주의”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이것이 Pelagianism [펠라기우스주의] 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사람이 자신 스스로 “그리스도를 자신 마음 안으로 초청”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희생-피 가 아니며,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얻는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스스로 얻는 구원입니다! 죄인은 기도를 통해서 스스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주님을 마음 안으로 초청하여” 얻는 구원입니다. 이런것에 멀리 떠나세요! 이 땅에서 이러한 결정주의로부터 멀리 떠나세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거나 행할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로마서 1:16).

“구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초청”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Luther 와 Bunyan 과 Wesley 와 Spurgeon은 어느 기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 그리고 확고하게 이 누구도 예수님께 간구해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들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 어느 형태의 기도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냥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하셨습니다! 이 진리가 여러분의 삶에서도 일어나길 추권합니다. 아멘.

(설교 끝)
여러분은 Dr. Hymers의 설교를 매주 인터넷 www.realconversion.com 에서
보실수 있습니다. “Sermon Manuscripts” 에 클릭 하시기 바랍니다.

You may email Dr. Hymers at rlhymersjr@sbcglobal.net, (Click Here)
or you may write to him at P.O. Box 15308, Los Angeles, CA 90015.
Or phone him at (818)352-0452.

Dr. Kreighton L. Chan이 설교 전 봉독했던 성경말씀: 마가복음 16:14-19.
Mr. Benjamin Kincaid Griffith이 설교 전 부르셨던 찬양:
“O Lord, How Vile Am I” (by John Newton, 1725-1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