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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함과 교제
(창세기 설교 제 22편)
(LONELINESS AND FELLOWSHIP)
(SERMON #22 ON THE BOOK OF GENESIS)

by Dr. R. L. Hymers, Jr.

이 설교는 2007년 9월 23일 주일 아침 시간에 로스 앤젤레스 태버네클
침례교회에서 하이머 박사님이 전하신 은혜로운 설교 말씀입니다

A sermon preached on Lord’s Day Morning, September 23, 2007
at the Baptist Tabernacle of Los Angeles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미국 사회학 조사의 공부는 (2006년 6월호) 젊은 사람들은 바로 20년 전의 사람들이 가진 것보다 오늘 날은 멀리 떨어진 소수의 친구들만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보고자는 말하기를, “사람들의 수는 거기에는 아무도 그들이 중요한 일을 세 사람에게 가까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만약에 우리들이 우정이 중요하다고 가정하면 (그리고 거의 모든 사회학자들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난 20년간에 크게 사회적인 변화가 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말할 어떤 사람이 있는 사람들의 수는 극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책 353, 371).

이 사회학의 조사는 고독함이 점점 커지고 있는 문제로 우리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고서는 다른 사람들의 그룹보다 젊은 사람들 18-39세 사이의 연령이 가까운 친구들을 더 잃어가고 있습니다 (같은 책 371면).

그러므로 젊은 사람들이 고독함의 슬픔에 의해 가장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 커져가는 문제의 논평은 워싱톤 포스트는 말하기를 “겉보기에는 사람들이 테레비전에서 친구들을 봅니다 그러나 실지로 많이 갖지 못합니다 (워싱톤 포스트. 6월 6일 2006년).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고독한 그룹입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그것은 초록색 날의 노래의 커다란 유행의 이유라고 보는데, “깨어진 꿈의 대로”입니다. 비록 저는 록 음악을 추천하지는 않지만, 저는 서정시가 아주 인기있는 노래로 오늘 날 많은 젊은이들이 무서운 고독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노래는 말하기를,


나는 고독한 길을 걷네,

내가 알고 있는 오직 한 길을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나를 모르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고향이고 나는 홀로 걷네,

나는 이 공허한 길을 걷네.

깨어진 꿈들의 도로위를

도시는 잠들어 있네.

그리고 나는 오직 홀로 그리고 나는 홀로 걷네…

나는 홀로 걷네. 나는 홀로 걷네.

나는 홀로 걷네.

( “깨어진 꿈들의 도로,” 그린 데이, 2004).


여러분은 그렇게 느껴본 적이 있나요? 거의 모든 젊은이들은 오늘 날 고독한 가슴이 부서지는 느낌을 경험하고 있음을 그 노래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거의 삼년 동안 라디오 방송에서 아주 인기였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그 노래는 완벽하게 그 사회학자들이 우리에게 보고하는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고독감은 오늘 날 젊은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고독감을 느껴 보신 적이 있나요? 거의 모든 젊은이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고독감을 느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역사의 시작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우리들은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이 성경의 본문에서 배우게 됩니다.

I. 첫째,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

성경의 열린 장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 1:31).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타락하기 전의 세상은 완전한 낙원이었습니다. 죄가 아직 사람과 환경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창조되었고 그리고 “모든 것이 좋았더라”는 세상에 거하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었는데 “에덴동산”이라고 불리는 완벽한 장소에도 존재하였습니다. 아담은 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창 2:18).

오스왈드 샌더스 박사는 말하기를, “성경적인 기록은 그의 원래 상태는 아담은 형태와 지식에서 완벽하였으며…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완벽하게 나왔으나, 아담은 아직도 완벽하지 못하게 끝이 났습니다 (오스왈드 샌더스 박사., 직면하는 고독함, 디스커버리 출판사, 1988년, 14면).

웹스터 사전은 고독감을 정의하기를 마치 “고독한 상태…홀로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음, 친구들로부터 홀로 떨어짐”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독감”이라는 것은 부정적입니다. “고독”이라는 단어는 우리들에게 슬픔을 느끼게 만듭니다. 우리 본문에 홀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의 단어는 “분리되어짐”의 뜻입니다 (스트롱 종합 사전, 제 909호). 그것은 히브리 단어의 “나누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책, 제 909호).

“분리 되어짐”은 고독함의 원인인 뿌리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오늘 날 자주 그들의 부모들의 이혼의 분리로부터 무서운 감정적인 공백을 경험하게 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고독을 느끼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사를 가고 그들은 그들의 친구들로부터 헤어집니다. 많은 부모들이 언제나 싸움을 합니다. 이 원인들은 젊은 사람들을 고독함으로 이끌어 갑니다.

고독감은 자주 여러분이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할 때에 옵니다 – 그리고 여러분의 동급생들로부터 이별할 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메일들과 “나의 공간”의 웹사이트는 진정한 친구들의 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실지의 사람보다 기계한테 여러분을 끌어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스포츠 이벤트나 영화나 “레이브”나 몰에 갈 수 있으며 거기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리고 아직도 여러분은 고독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별”과 “나누임”이 여러분과 다른 사람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들의 수백명이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직도 고독감을 느끼는 것은 왜냐하면 아무도 여러분을 알거나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샌더스 박사는 말하기를,

우리의 멋대로 하게하고 부유한 웨스턴 사회는 그들의 모든 욕망을 거의 만족하게 하여 주는 것,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많은 고독의 벌의 희생자들이 되고 있습니다…많은 사실들이 이 결과를 형성하는데 합하여지고 있습니다. 파죽지세의 변화는 사회의 사회 구조에서…전례가 없는 움직임이 땅과 공중에서 이런 경향들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매년마다, 도시에 살고 있는 사회의 이십 퍼센트가 그들의 주소를 바꾸고 있습니다. 이 [원인들은] 가족 그룹을 나누고 그리고 계속되는 우정의 형태와 공동체의 정신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입니다…역설적으로, 세상은 빠르게 도시화하고 있습니다 – 현대 사조는 백만 명이 넘는 300개의 도시들을 태동하고 있습니다 – 강제적으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가까이 함께 살고, 점점 더 사회적인 고립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1982년에 있었던 센서스에 의하면, 오직 중국에서 이십 퍼센트의 사람들이 도주 중앙에 살고 있습니다. 1986년도에 비율은 삼십칠 퍼센트로 솟아올랐습니다…큰 도시들은 두려움과 의혹에 의한 것이 우정보다 더 많았습니다 (오스왈드 샌더스, 같은 책., 17-18면).

한 젊은이가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을 떠나서 영국의 큰 도시에 있는 대학에 출석하였는데 그는 말하기를,

집에서 나는 홀로 걸으며, 나의 눈을 들었고, 사람들의 눈동자를 만났고 나에게 길을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 이웃들, 가족들, 친구들입니다. 우리들은 소리 내어 부릅니다. 우리들은 서로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영국에서 내가 여러분의 거리를 홀로 걷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동자는 나의 눈동자를 만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멀리 보며, 나의 쳐다봄을 피합니다. 아무도 나에게 인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달려가는 것 같고 [그리고] 조용합니다 (같은 책. 21면).

여러분은 가끔씩 로스앤젤레스 여기서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홀로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창 2:18).

“분리”와 “나누어짐”은 하나님 앞에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혼자되고 고립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II. 둘째로, 하나님은,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2:18을 큰 소리로 읽읍시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하나님은 첫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돕는 자를 그를 위해” 지으셨습니다. 요한 세일하머 박사는 말하기를 그 히브리 단어들은 그를 위해 돕는 자로 번역되었으며 킹 제임스 버전에서 그를 위해 돕기 알맞은 일반적인 감각을 가졌습니다 (요한 세일하머 박사., 성경 해설 주석, 프랭크 개베레인 박사, 편집장, 리젠시 레퍼런스 도서관. 1990, 제 2권, 18면). 세일하머 박사는 그리고 말하기를, “그 이야기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사람이 여자의 도움이 필요한 위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혼자 남아 있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같은 책). 요한 길 박사는 그 요절을 지적하기를,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는 의미는,

한 사람이 그를 생애의 모든 일들을 돕는 것 (요한 길 박사., 구약 성경 주석, 침례교 표준 출판사, 1989 재판, 제 1권, 19면).

이제 이것의 더 깊은 의미는 에베소서 5:30-32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0-32).

31절은 사도 바울에 의해 창세기 2:24로 부터 인용된 것입니다. 창세기 2:23에서 스코필드 성경 공부 주석은, “이브,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의 모형입니다…엡 5:25-32.” 스코필드 주석은 엡 5:32에서 말하기를, “이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의 분명한 모델[입니다].” 요한 길 박사는 말하기를,

“이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것은 그 속에 가끔씩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의 신비로운 연합의 상징입니다 (같은 책).

자, 제가 성경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가능한 대로 그것을 간단하게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홀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그의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홀로 많이 계셨습니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셨을 때에 동산의 무덤 속에 그는 홀로 계셨습니다.

그러나 처음 아담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홀로 남기고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신부를 준비하셨고, 그리고 그 신부는 교회입니다. 각 지역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왜냐하면 우리가 그에게 와서 회심할 때에 우리들이 그에게 연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로 나올 때에, 여러분은 지역 교회에서 그의 신부의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닌데 왜냐하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일 1:3).

고독함은 여러분이 그리스도께로 나올 때에, 회심할 때에, 그리고 우리들과 함께 교제에 들어올 때에 사라지고 마는 것이며…그리고 지역 교회에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함께 있을 때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고 “우리와 교제”를 갖기 때문입니다.

모든 끓는 것을 내려서 그리고 그것을 정말 단순하게 만들어 교회에 이전에 한번도 나와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말하기를, “왜 홀로 있습니까? 집으로 돌아오고 – 교회에 오십시오! 왜 잃어 버렸습니까? 집에 오세요 – 예수 그리스도께로, 하나님의 아들께!” 제가 그것을 제가 작사한 짧은 노래를 만든 것을 잠시 전에 우리들이 모두 불렀습니다,

집으로 예수님께로 오세요 식탁이 펼쳐있네;
집으로 저녁을 먹으로 와서 그리고 빵을 나눕시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네, 그래서 그것을 말하시네,
집으로 저녁을 먹으로 와서 그리고 빵을 나눕시다.
집으로 교회에 나와서 먹읍시다,
행복한 친교로 함께 모이세;
그것은 참 좋은 대접일세
우리들이 앉아서 먹을 때에!
   (“저녁을 들러 오세요” 알. 엘. 하이머 박사 작.).

이제 저는 결론적으로 한 가지만 더 하겠습니다. 버논 맥기 박사는 우리 본문에 대하여 주석하였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맥기 박사는 말하기를,

어느 기간 동안 동산에 하나님이 사람을 홀로 두신 것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그가 그와 함께 어떤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버논 맥기 박사., 성경을 통하여, 토마스 넬슨 출판사, 1981, 제 1권, 21면).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고독을 느끼게 하신 것은 비슷한 목적을 갖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여러분의 고독함을 여러분이 또한 필요함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떠나서 여러분 홀로 있고 여러분이 고독감을 느끼지 않고는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는 것의 필요함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분을 위한 여러분의 고독함을 여러분에게 깨우쳐 주시기 전에는 여러분은 예수님이 필요함을 전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우리의 마음들은 그들이 그분 안에서 휴식을 얻기 전에는 쉴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여러분에게 믿음으로 그리스도께로 나오라고 재촉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육체적으로 부활하심으로 여러분은 그를 통하여 생명을 얻게 되고 그리고 교회에 완전히 올 수 있고 그리고 위대한 크리스천 친구들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이 평생동안 지속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 말하기를, “왜 고독을 느낍니까? 집으로 오세요 – 교회로! 왜 잃어 버린자가 되었습니까? 집으로 오세요 –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께!”

일어서서 제가 작사한 짧은 노래를 다시 부릅시다. 그것은 여러분의 노래 곡 1장에 있습니다. 노래 곡을 들고 큰 소리로 잘 부릅시다!

집으로 예수님께로 오세요 식탁이 펼쳐있네;
집으로 저녁을 먹으로 와서 그리고 빵을 나눕시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네, 그래서 그것을 말하게 하셨네,
집으로 저녁을 먹으로 와서 그리고 빵을 나눕시다.

그 교제는 행복하고 당신의 친구들이 거기에 있겠네;
우리들은 식탁에 앉을 거시고 우리의 마음들은 기쁨이 가득하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네, 그래서 그것을 말하게 하셨네,
집으로 저녁을 먹으로 와서 그리고 빵을 나눕시다!

그 큰 도시 사람들은 바로 돌보지 않는 것 같네;
그들은 작게 제공하고 여분의 사랑이 없네,
그러나 집으로 예수님께 나오면 그리면 당신은 알게 되네,
거기 식탁에는 음식이 있고 우정을 나누네!

집으로 예수님께 나오세요, 식탁이 차려있네;
저녁을 위해 집으로 오세요, 당신을 먹일 것이네.
당신의 친구들이 기다릴 것이고 대화를 나눌 것이네,
저녁을 위해 집으로 와서 빵을 나눕시다!

후렴:

집으로 교회에 나와서 먹읍시다,
행복한 친교로 함께 모이세;
그것은 참 좋은 대접일세
우리들이 앉아서 먹을 때에!
   (“저녁을 들러 집으로 오세요” 알. 엘. 하이머 박사 작.,
      “비둘기의 날개들” 의 툰으로).

친구여, 예수님께 집으로 오세요! 교회로 집으로 오세요! 왜 오늘 밤 오후 6시에 크리스천의 친교와 좋은 깨끗한 재미를 위해 다시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밤 6시에 봅시다!

(설교 끝)
여러분은 하이머 박사님의 설교를 www.realconversion.com 에서 매주 인터넷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설교 사본”을 크릭하시기 바랍니다.

크레이톤 챈 박사님이 설교 전에 성경 말씀을 읽겠습니다: 창세기 2:18-24.
벤자민 그리피스 박사가 독창곡을 설교 전에 부르겠습니다:
“깨어진 꿈들의 도로” 그린 데이 작, 2004).


설교요약

고독함과 교제
(창세기 설교 제 22편)
(LONELINESS AND FELLOWSHIP)
(SERMON #22 ON THE BOOK OF GENESIS)

by Dr. R. L. Hymers, Jr.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I.   첫째,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
창 2:18상; 1:31.

II.  둘째로, 하나님은,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창 2:18중; 엡 5:30-32; 요일 1:3.